저 하늘의 구름따라… 26 MAY 2010

뭉게구름 / 최승호
나는 구름 숭배자가 아니다
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
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
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
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
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
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
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과 무게를 알지 못한 채
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
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
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
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
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
문득, 가을이었으면 좋겠다…

소금창고
염전이 있던 곳
나는 마흔 살
늦가을 평상에 앉아
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
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
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
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
역광을 받아 한번 더 피어 있다
눈부시다
소금창고가 있던 곳
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
수은처럼 굴러다닌다
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
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
염전이 있던 곳
나는 마흔 살
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
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다
_ 이문재
축령산 오르는 길에 핀 민들레꽃~

민들레
누가 불렀니
가난한 시인의
좁은 마당에
저절로 피어난
노오란 민들레
해질녘
골목길에 울고 섰던
조그만 애기
두 눈에
눈물 아직 매달은 채로
앞니도 한 개 빠진 채로
대문을 열고 들어섰구나
만 가지 꽃이 피는
꽃밭을 두고
가난한 시인의
좁은 마당에
환하게 불을 켠
노오란 민들레.
(허영자)
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워하는…

시인 예수
그는 모든 사람을
시인이게 하는 시인
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
새벽의 사람
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
고요한 기다림의 아들
절벽 위에 길을 내어
길을 걸으면
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
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
사람의 바람
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
용서하는 들녘의 노을 끝
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워하는
아름다움의 깊이
날마다 사랑의 바닷가를 거닐며
절망의 물고기를 잘아먹는 그는
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
홀로 켠 인간의 등불.
정호승
다들 안녕하신지…
선운사에서
꽃이
피는 건 힘들어도
지는 건 잠깐이더군
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
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
아주 잠깐이더군
그대가 처음
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
잊는 것 또한 그렇게
순간이면 좋겠네
멀리서 웃는 그대여
산 넘어 가는 그대여
꽃이
지는 건 쉬워도
잊는 건 한참이더군
영영 한참이더군
(최영미)
당분간 폐업합니다, 이 들끓는 영혼을. ..

겨울나무
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
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
빈 벌판
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
속에
말없이 서있는
흠없는 혼
하나
당분간 폐업합니다, 이 들끓는 영혼을.
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
마음도 떼어 버리고
문패도 내렸습니다.
그림자
하나
길게 끄을고
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.
(詩 장석주)
비명

오늘아침, 어쩌면 12월26일의 아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. 축제는 끝나고, 너무도 고요해서 비명소리같은 아침입니다. 김혜순의 시가 떠올랐습니다.
“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들리는 것 같은 비명.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. 어젯밤의 어둠이 내지르는 비명. 오늘 아침 허공중에 느닷없이 희디흰 비명이 아 아 아 아 흩뿌려지다가 거두어 졌다…”
(불쌍한 사랑기계 “쥐” 중에서)
